김상곤 울산시 감사관

다양한 계절의 모습은 가을 속에서 서로 만난다. 봄의 향기가 여름 태양의 열기 속에서 달궈지면 가을은 그들을 식혀서 열매로 품는다. 지구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내일에의 약속인 것이다. 2016년 울산에도 가을을 위한 계절의 장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른 봄부터 문수로의 벚꽃은 유독 환한 모습으로 신호등처럼 피어나 우리의 봄밤을 들뜨게 했다. 이파리도 없이 추위를 견디는 봄꽃의 화사함에 젖어 경주 벚꽃놀이가 별거냐고 힘주어 말하는 이도 여럿이었다. 

여름도 여느 해의 모습과는 달랐다. 봄의 짙은 향연은 어느 순간 열기로 바뀌어 땅을 뜨겁게 달궜다. 울산의 모든 온도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기록을 만들었다. 연일 경신되는 최고기온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매일 보는 태양을 적대감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내일도 오늘보다 기온이 더 올라갈 거라는 기상예보는 얼마나 깊은 걱정과 한숨을 만들어 내었던가. 그러나 우리의 오랜 경험은, 자연의 폭거와도 같은 더위도 일상을 잠시 불편하게 할 뿐, 생명을 위협하거나 생활의 근거를 파괴할 수는 없다는 믿음을 만들어줬다. 잠시 스쳐가는 유별난 현상일 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자연의 모습은 아니라고 애써 외면했다. 더러는 자연의 움직임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징후를 내포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하기도 했지만 귀담아 듣는 이는 많지 않았다.

드디어 모두가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싶은 계절이 왔다. 해시계에 그림자가 놓이는 가을은 위대하다고 외친 시인의 말처럼 올해의 가을은 정말로 위대하다고 환영했다. 지난 계절의 유별난 모습은 정상을 되찾고 우리가 기대하는 가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안심하고 위로했다. 순환하는 계절을 모두들 얼마나 감사하게 받아들였던가. 그 가을을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던가. 그러나 이 가을은 우리의 바램, 기대와는 다르게 저 갈 길을 묵묵히 가고 말았다. “우주는 우리에게 적대감도 동정심도 가지지 있지 않고 다만 무관심할 뿐이다”는 물리학자의 말을 사례로 보여주기나 하듯이 도시의 가을에 해시계 그림자와 더불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땅의 진동을 가져다줬다. 그 것 역시 한반도 최고의 기록이었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기도는 조금씩 두려움으로 바뀌어 갔다. 작은 것에도 놀라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에 대한 경험과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깊이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화불단행이라고 했던가. 재앙은 혼자 오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세상의 원리 인줄만  알았다. 그러나 자연세계의 인과율에도 적용되고 말았으니 이번에는 물의 시험이었다. 측정사상 최고의 기록이라는 말에도 무덤덤해진 우리에게 자연은 인간의 마을 가운데로 물길을 만들어 사람들을 혼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인간의 생명과 터전을 위협하는 자연의 용틀임이었다. 인간의 안전과 살이의 터전을 송두리 째 위협하는 자연의 절박한 시험과 물음에 인간은 결연한 몸짓과 의지로 답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도시가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마을임을 알리는 휴머니티의 깃발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의 가혹한 물음에 제일 먼저 답한 사람은 29살의 젊은 소방관이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하는 마지막 임무 속으로 결연하게 뛰어든 그 순간 마음속에는 무엇이 떠올랐을까. 대대로 이어온 제복에 값하고자 하는 신념도 있었을 것이다. 이웃의 외침을 외면하지 못하는 젊은 혈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신념과 원칙을 혹독한 자연의 질문 앞에서 망설임 없이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 도시에 핀 가을꽃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작은 감정의 흔들림으로 타인에게 흉기를 쉽게 휘두르는 이 아픈 세상에 핀 고귀한 가을꽃이 아니겠는가? 이 도시의 자존을 지켜준 소중한 꽃이 아니겠는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밤새 무서리가 내린다는데 하물며 인간의 꽃이 지고 말았는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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