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ad27

“돈 벌러 갔더니 생지옥… 두 눈까지 잃을 뻔”

기사승인 2017.08.13  22:30:00

고은정 기자

공유
1면  
default_news_ad1

[광복 72주년 특별 인터뷰] 일제 강제노역 생존자 93세 장갑종 옹

가난에 19살때 히로시마行
알고보니 자유없는 ‘노역자’
수급 받은 옷엔 ‘26’ 번호판
대형 개 풀어 탈출 엄두못내
‘조센징 더럽다’ 몸싸움도
해방 후 빈손으로 귀향
“일본인들 반성했으면…”

일제강점기 강제노역 피해자인 장갑종 옹이 지난 11일 중구 북정동의 자택에서 강제노역 당시 상황을 기억하며 생각에 잠겨 있다. 김정훈 기자 idacoya@iusm.co.kr


15일은 72번째를 맞이하는 광복절이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 업무지원단에 따르면, 대일항쟁기 강제동원자 중 울산에서 현재 정부의 지원금을 받고 있는 생존자는 2017년 1월1일자 기준으로 총 55명이다. 울산의 생존자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노역을 했고, 남양군도, 중국 등에 강제징집된 사람들도 있다.

정부지원을 받고 있는 울산생존자 중 한명인 장갑종(중구 북정동·93) 어르신을 지난 11일 자택에서 만났다.

◆일찍 아버지 여의고 돈 많이 벌수 있다는 말에 속아

“돈을 많이 벌수 있다고 해서 일본가는 배를 탔는데 돈 구경은 못하고 두 눈까지 잃을 뻔 했는기라.”

장갑종 어르신은 70여 년 전의 일을 생생히 기억했다.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면서도 두 시간여 거침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때로는 악랄했던 일본 관리자를 흉내 내며 일본어도 곧잘 했다. 

경주 양남에서 태어난 장갑종 어르신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당시는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일본이 공출로 다 뺏어가는 시절이었다. 3남중 막내였던 그는 돈을 많이 벌수 있다는 말에 속아 1943년 3월, 이웃에 사는 형과 함께 히로시마행 배를 탔다.

그의 나이 19살이었다. 배에는 경상도 뿐 아니라 평안도, 황해도 등 이북에서 온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배에서 내려 기차를 탔고 밤새 달려 히로시마 도까이무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다시 트럭에 나눠 타고 하루이상을 달려 도착한 곳이 산골짜기 한 수력발전소였다. 

◆수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시멘트 눈에 들어가 

“깊은 밤에 도착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신체검사를 하더니 똑같은 옷, 모자, 신발을 주더라고, 그런데 ‘자유행동’이 도통 안 되는 기라. 일본 관리자가 무조건 감시하고….”

장갑종 어르신의 옷에는 26번이라는 번호판이 달렸다. ‘자유행동’없는 고된 노역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탈출을 시도했고, 일본인 관리자들은 공장에 큰 셰퍼드를 풀어 탈출을 막았다.

어르신은 이곳에서 바짓가랑이가 기계에 말려들어가 죽을 뻔하며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결국 공사장에서 시도 때도 없이 튀어 오르는 시멘트가 양쪽 눈에 들어가 히로시마 도심의 대형병원에서 4개월간이나 입원해야 했다. 하루는 오랜 입원으로 친해진 일본인 의사의 요청으로 산에 함께 산책을 갔다가 장어르신이 송이버섯을 땄는데 그 순간 따귀가 한 대 날아 왔다. 주인이 있는 버섯을 왜 따냐는 것이었고, 이후 일본인 의사는 사과를 했지만 어르신은 그 일로 일본인들의 성향을 다시 생각했다고 한다. 

◆“조센징 더럽다’는 말에 일본인과 몸싸움도

“일본인들도 거기서 일을 많이 했는데 한 일본인이 갑자기 일본말로 ‘조센징 나쁘다’ ‘더럽다’며 욕을 하더라고, 처음엔 조금 말대꾸를 하다가 슬슬 약이 올라 그 자리에서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했지. 거기서 일본 놈과 구르면서 싸운 조선인은 나밖에 없을 기라.”

장갑종 어르신은 오랜 병원생활 끝에 눈을 회복한 후 다시 일을 해야 했다. 해군들만 있는 우라시마섬에서 굴을 파기도 했는데 굴은 해군 피난처와 연료 등 전쟁물자 보관소로 이용됐다. 시코쿠 비행장 공사장에서도 굴을 팠다. 밥은 서서 먹었고 찰기가 전혀 없는 안남미(安南米)를 젓가락으로만 먹어야하는 것도 조선인들에게는 큰 곤욕이었다. 

장 어르신의 바람과는 달리 일본에서의 노역동안 한 푼도 지급받지 못해 사실상 강제노역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일본인 반성하고, 가족 건강했으면”

어르신은 조국해방소식을 듣고 보름 만에 우여곡절 끝에 부산으로 오는 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집에 들어가려하니 돈 한 푼 없이 모양이 영 안 좋더라고. 그래도 어머니는 막내아들 목숨은 건져왔다고 좋아하시대.”

몇 년 뒤 일자리를 찾아 혈혈단신 울산으로 온 어르신. 정미소, 술도가 등에서 일을 하다 김영순씨(86)를 만나 가정을 이룬 뒤 중구 북정동에 정착, 농사를 지으며 3남3녀를 남부럽지 않게 잘 키워냈다. 현재는 당시 다쳤던 후유증으로 시력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매일 복산공원을 산책하고 경로당에서 동네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일본 놈들이 조선인들한테 했던 나쁜 일 반성하고, 우리 할마이하고 자손들 건강히 살았으면 좋겠네.” 장갑종 어르신의 바람이다.

고은정 기자 kowriter1@iusm.co.kr

<저작권자 © 울산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기사 수정 :   2017-08-15 13:19   고은정 기자
웹출판 :   2017-08-13 19:59   관리자
입력.편집 :   2017-08-13 19:57   정명숙 기자
ad28
ad26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오늘 많이 본 지면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ad29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