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 수단과 함께 진화한 ‘가짜’
1인 미디어 등 발달하면서 ‘진짜’ 위협
재미·흥미가 유일한 기준 될 수는 없어

정부 불리한 뉴스라고 ‘가짜’로 몰면
합리적 비판·건전한 견제 틀어막아
언론자유 재갈 물리는 결과 밖에 안돼

 

김병길 주필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한때 유행한 대중가요 ‘세상은 요지경’의 가사다.

‘가짜 뉴스’(fake news)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가짜뉴스는 옛날에도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중종이 즉위한지 14년째인 1519년에 중종의 후궁인 희빈 홍씨가 중종을 찾아가 아뢴다. “전하, 제 처소에 있는 나인이 참으로 해괴한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희빈 홍씨가 중종에게 보여준 그 나뭇잎에는 벌레가 갉아먹은 흔적이 꼭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한자 글씨처럼 남아있었다. 주초위왕은 ‘주초(走肖)가 왕이 된다’는 말이다. 주(走)와 초(肖)를 합치면 조(趙)가 된다. 이는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다.

여기 등장한 조씨는 당시 중종의 신임을 받아 강력한 개혁정책을 펼쳐 나가던 젊은 정치가 조광조(趙光祖·1482~1520)를 가리켰다. ‘조광조가 공신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는 괴소문이 곧 궁궐과 도성에 파다하게 퍼졌다.

조광조는 왜 이런 소문에 휘말렸을까. 조광조가 펼치던 개혁 정책 중에는 “훈구파 공신수를 줄이자”는 것도 있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훈구파가 자신들과 뜻이 맞는 후궁들과 짜고 만들어낸 가짜 뉴스가 바로 ‘조씨가 왕이 된다’고 적힌 나뭇잎이었다.

 
중종은 조광조를 높이 평가해 권력을 맡겼지만, 조광조가 너무 급하고 과감하게 개혁 정책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차에 나뭇잎 사건이 터지자 이를 핑계 삼아 조광조를 귀양 보내 사약을 내리고, 조광조를 따르던 수많은 사림파 신하들도 조정에서 몰아냈다. 기묘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역사는 기묘사화(己卯士禍)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가짜뉴스는 괘서(掛書) 즉 대자보로도 많이 퍼뜨렸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누군가 몰래 써 붙인 글을 괘서라고 했다. 벽에 많이 붙인다고 벽서(壁書)라고도 한 이 대자보는 특정 인물이나 당파를 비방하는 내용이 많았다.

끊이지 않았던 괘서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통로인 한편, 보통 사람이 권력자를 비판할 수 있는 통로도 됐다. 지금은 헌법에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 기사를 통해 정부가 잘못한 점을 비판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기자도 신문도 없었으니 괘서가 한 몫을 했다. 하지만 괘서는 진짜 뉴스보다 가짜 뉴스를 퍼나르는 부정적 역할도 적잖게 했다.

이처럼 가짜 뉴스는 어느날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인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 발전과 함께 진화해 왔다.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던 양치기 소년 우화는 고대로부터 잘못된 정보가 인간사회에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일깨워 준다.

거의 모든 정보가 공개되고, 미디어가 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난 요즈음 오히려 가짜 뉴스가 더 범람하는 현실은 역설적이다. 정치적 억압이 심했던 과거에 ‘자유 언론’이 소중했다면, 1인 미디어를 포함해 아무나 뉴스를 만들 수 있게 되자 가짜가 진짜를 위협하고 있다.

기존 언론도 자극적 제목이나 고정관념과 편견에 사로잡힌 표현, 통계에 대한 무지 등 비판 받을 점은 많았다. 하지만 그들에겐 ‘사명감’이 존재했다. ‘공정성’, ‘객관성’이란 명분으로 뉴스를 걸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오로지 재미와 흥미만이 유일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비판도 쏟아진다. 

안타깝게도 범죄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가짜 뉴스는 더 교묘한 방법으로 이 세상을 맴돌 것이다.

한국에 4·19 혁명’이 있다면 중국에는 ‘4·19 거사’가 있다. 한국의 4·19와 다른 것은 중국에선 ‘4·19’를 잊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1958년 4월 19일 새벽 5시, 베이징에서는 200곳으로 나뉜 ‘전구(戰區)’에서 총지휘관 명령에 맞춰 사수들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총을 들지 않은 시민들은 세숫대야와 물통을 두들기거나 꽹과리를 치며 ‘진격’을 함께 했다. 이른바 ‘참새 섬멸 대작전’이었다. 1958년 한해에만 중국 전역에서 2억1,000만 마리의 참새가 소탕됐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현상이 뒤따랐다. 참새가 사라진 전국의 논밭에서 해충이 기승을 부리고, 골목과 가로수엔 온갖 벌레들이 들끓었다. 농작물이 초토화 되면서 대기근이 닥쳤다. 몰래 소련에서 20만 마리의 참새를 얻어다 풀어놓는 궁여지책까지 동원했지만,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어쩌다 이런 사달이 벌어지게 됐을까. 중국 공산당 중앙당에 접수된 “참새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한 농민의 탄원서가 발단이었다. 

마오쩌둥 주석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참새를 박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국영 연구기관은 “참새 한 마리가 매년 곡식 2.4kg을 먹어치우니, 참새만 박멸해도 70만 명이 먹을 곡식을 더 수확할 수 있다”며 마오쩌둥의 ‘혜안(?)’을 찬양했다. 

중국의 문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참새들의 ‘적폐’를 규탄하는 시(詩)를 쏟아냈다. 정작 동물학자들은 문외한들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오래전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떠올린 것은 합리적 비판과 건전한 견제가 틀어막힌 사회에서 어떤 참극이 벌어졌는지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가짜 뉴스와의 전쟁’을 선포한 정부의 가짜 뉴스 근절대책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는 정부·여당에 불리한 뉴스를 닥치는대로 ‘가짜 뉴스’라고 몰아치는 모습이 위협적이다. 

더 큰 문제는 정부기관이 허위여부를 판단토록 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 중에는 법원이 허위라 판단했다가 나중에 진실로 드러난 경우도 적잖다. 정부가 재단하고 처벌까지 하겠다면 완전히 언론자유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것이다.

‘가짜 뉴스’가 아닌 ‘가짜 뉴스 낙인 시대’가 된다면 큰일이다. ‘불쾌한 뉴스’는 다 ‘가짜 뉴스’라면 뉴스는 이미 다 죽었다. 정말 가짜 뉴스를 일소하겠다면 피아(彼我) 구분부터 없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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