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 선수마을에서의 추억을 더듬고 있는 유용하씨  
 
   
 
  ▲ 4H 활동 중 농촌진흥원 정문에서(1965)  
 
   
 
  ▲ 개운회에서 발간한 고향 소식지 <마음의 고향 선수>  
 
   
 
  ▲ 망향탑의 글귀는 서예가 유용하씨가 썼다.  
 
   
 
  ▲ 성암동 전경(왼쪽)  
 
   
 
  ▲ 성암동 전경(오른쪽)  
 

8대를 살아온 내 고향 선수…성(城)지기 떠난 곳에 터 잡고 살아
유공 건설 때 고사마을 사람 대부분 부곡동 언덕서 텐트 생활
외황강 폐수 범벅된 후 모기 때문에 밥상조차 제대로 못 내놔
국가 시책 거스르지 않은 공해 이주민들 위해 망향동산이라도

고향이 개운포성이 있는 성암동인데, 지금 쓰레기 소각장 있고, 그 동네에서 살다가 공해 이주를 다운동으로 했거든요. 1948년생이지요. 계속 거기서 살았지요. 8대를 살았으니 240년은 살았겠죠. 우리 선대들이 제일 먼저 터를 잡았다는 그런 이야기를 구전으로 들었지. 무슨 기록이나 이런 거는 없고. 우리 할아버지가 선수에 완문을 썼어요. 지금도 내가 가지고 있는데, 성지기들이 도망을 가버리고 하니까, 성을 지키는 사람들한테 토지를 나눠 줘, 그걸 경작해 먹고 살도록 그렇게 배려를 한 그런 문서라. 그게 1870년 고종 7년인데, 울산 부사에게서 증명을 받은 문서가 완문이지요.

# 정유공장 지을 때 천막학교에서 데모
초등학교 동기가 한 15명 됐어요. 대현초등학교 나왔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정유공장 짓는다고 학교를 철거해 선암동 산 중턱에서 텐트 생활을 했거든. 그때 중학교 3학년이니까, 머리가 굵은 몇 이가 ‘학교 빨리 지어달라고 우리가 데모를 해야 된다.’ 해가지고 여름방학 때 데모를 해 교장 선생한테 잡혀 가 혼도 나고, 그래도 그 덕분에 대현중학교는 좀 빨리 지어졌어요.
대현국민학교, 대현중학교는 지금 정유공장 안에 있었지. 처음에는 대한석유공사지. 대한석유공사를 SK에서 인수했어요. 그때 고사리 주민들은 정유공장 짓는다고 부곡동 산 중턱으로 나와서 거기에 텐트를 치고 생활을 했다고. 그런 애환을 다 겪었는데, 그래 이주민들이 물은 샘에서 떠다 먹고 그렇게 했지 뭐. 고사동 주민들은 철거된 뒤에 텐트 생활하다가, 그 부지에 집을 짓는 사람도 있고, 그 다음에 딴 데로 이사 가버리는 사람도 있고. 무조건 그때는 강행했던 거지. 요즘 같으면 안 되는데,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해서 울산공단이 이루어졌는데, 대한민국이 현재 이렇게 부흥한 나라로 성장하기까지는 그런 아픔이 있었는데, 딴 사람들은 그런 거 겪어보지 않았으니 모르지.

#공업센터기공식 때 박수 부대 '자부심'
중학교 때 매암동 동양나일론 자리에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을 했어. 거기에 학생복 입고 우리가 동원이 됐어. 거기에 참석하니까 헬리콥터 타고 박 대통령이 선글라스 쓰고 왔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지. 폭죽 터뜨리고, 폭파시키고 하는 걸 박수부대로 간 그런 기억이 있지.
‘울산에 공장이 지어 지겠구나’,‘ 변화가 시작되는구나’ 그걸 몸소 체험한 거지. 동네 분들도 아마 긍정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했을 거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을걸.
우리 동네에서는 SK에서 불 올라가는 건 좀 보였어. 그 당시에는 시에서 공장 촬영하러 가면 공장 굴뚝에 연기를 좀 내달라고, 사진발 안 받는다고, 그런 시기가 있었어. 그러니 참, 그 당시에는 공장이 어떤지, 공해가 어떤지 그것도 몰랐던 거야. 공장만 지어지면, 굴뚝이 세워져 있는데 연기가 안 나니까 굴뚝 안 같으니까, 그런 식으로 일부러 연기를 내고….호랑이 담배 필 때 이야기지. 옛날에 그런 노래도 부르고 그랬어. 굴뚝에 연기가 치솟고, 공장이 돌아가는 기계 소리가 나고…. 그런 시기도 있었으니까.

# 마을사람 대부분 다운동으로 공해 이주
이주할 당시에는 외황강에서 내려오는 석유화학 폐수가 내려와서 강이 썩어가지고 밥상 이렇게 채려놓으면 모기나 하루살이가 달려들어 밥을 못 먹었어. 그런 정도로 형편없었지. 그래서 ‘환경오염 이주 사업’이 벌어졌지. 변전소 남쪽으로는 집단 이주를 다 시켰다 말이야. 1차, 2차, 3차로 해가지고, 3차는 부곡, 황성, 용연, 용잠, 성암 일부. 88년도에 2,919세대, 12,016명이 3단계 이주를 한 거지요. 나는 3단계 때 이주를 했죠. 공해가 심할 때는 저기압일 때는 숨도 잘 못 쉴 정도로 안 좋았어. 그러니까 만사 귀찮으니까 빨리 나가야 되겠다. 그런 심정이었지. 밥 먹는데도 벌레가 떨어지니까.
선수 마을 분들이 대부분 다운동으로 갔지. 다운동에 집을 안 지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땅을 팔기도 하고, 다른데 집 짓는 사람도 일부 있었어. 다운동 사거리에서 척과 쪽으로, 선수뿐만 아니고 세죽, 용연 사람들이 왔지. 발전소에 들어간 남화동 사람들은 남구 야음동으로 갔어. 그때 부곡, 황성, 용연, 용잠, 성암동이 같이 이주했어. 집만 덩그러니 있고 땅도 없고 이러면 보상이 적어가지고 이쪽에 택지는 받았지만, 그 집 짓고 나면 먹고 살기도 막막하고 그래서 집을 안 지은 사람도 있고, 그런 애로사항이 있기는 있었어요. 다른 돈벌이가 없는 집은 어려움이 많았지.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어. 어머니 집은 2층으로 지어서, 2층에 사시고 1층은 세주고. 지금도 선수 마을에서 간 사람들이 많이 있지. 대부분이 거기 살고 있어요. 일부는 나가고.

# 마을 향우회 참석인원 갈수록 줄어
망향공원 거기 운동장 만들었는데 향우회 모임은 거기서 해요. 음식도 나눠 먹고, 옛날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마을잔치지. 한 70~80명은 오더라고. 그게 이제 해가 갈수록 조금 조금씩 줄어들기는 하는데, 어른들이 자꾸 죽으니까, 젊은 후세들이 참석을 해줘야 되는데, 그게 안 돼서 좀 아쉽지. 향우회 저것도 용연, 성암, 용잠, 요런 데는 참 잘 되는데, 그 외에는 잘 안되더라고. 1년에 한 번씩 하지. 봄에 할 때도 있고, 가을에 할 때도 있는데, 주로 봄에 하지. 날짜는 임원진들이 정하지. 찬조금을 어른들 중에 내고 싶은 사람들 내고, 그리고 형편이 좀 괜찮은 사람들은 더 내서 우리 고향 마을 잔치하는데 보태 쓰라고, 기업인들도 있어.

# 망향동산에 공단 이전 역사 기록남겨야
2002년에 각 향우회 회장과 남구의원 간담회를 개최해서 망향공원조성 기본 규모 및 의견을 수렴해서 2003년도에 수립했네. 2002년도부터 시작했으니까 20년이 다돼가도 아직까지 이게 준공이 안 되고 지지부진하게 되어 있는데, 우리 힘으로는 딸려서 안 되더라고. 망향공원 이거를 우리는 이주민이기 때문에 절박한데 딴 사람들은 이해를 못 하는 거야.
5,950세대 27,000여 명이 이주를 했는데,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공단이 생기기 전에는 주민들이 이렇게 살았구나. 그렇게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해놓고 우리가 죽어야 되지 않느냐, 그게 우리 사명감이 아닌가 싶어. 큰 사업을 했으면 제대로 된 기록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나서 부수던지, 개발했으면 그전의 모습도 기록으로 남겨놔야지.
망향공원 이런 걸 쓸 데 없는걸 뭐 하려 하느냐? 그런 식으로 자꾸 이야기하는데, 옛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킬 줄 알고, 아끼고 그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발전이 지속되고 좀 더 좋은 발전을 이룰 수 없어요. 껍데기만 해 가지고는 안 되거든. 공단이 생기기 전에 우리 선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먼 훗날 그거 보고 ‘이렇게 살았구나.’ 그런 게 중요한 역사인데, 그걸 깔아뭉개고, 그런 걸 무시해버리고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발전이 없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잘 안 먹히더라고. 이야기를 해도 그거 뭐 고리타분한 잔소리한다는 식으로….

# 떠난 고향 선산 갈수록 그리워져
선수 마을에는 자주 가지요. 부친 묘소도 거기에 있고, 그러고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도 그 인근에 다 있으니까. 사람이 환갑을 지내야 좀 인간이 된다고 해. 그래, 환갑이 지나니까 뿌리라든가 이런 게 생각이 들고. 철이 들어서 좀 수시로 울적할 때나 이러면 산소 한 번 갔다 오면 좀 마음이 뿌듯하고 괜찮아. 그런 게 있어. 그래서 가능하면 시간이 되면 가려고 노력하고 있어. 나는 그냥 좀 사람이 좀 덜 됐어. 딴 사람들은 주로 일찍 서울로 진출해서 잘 됐다고 하는데, 인간 못 된 기 고향 선산 지킨다고 그랬어. 그래 나는 인간이 좀 못 되어 가지고 8대를 살다가 우리 때 떠난 고향이 자꾸 애착이 가더라고. 지킬 수가 없었지. 내가 지킬 수 있었으면 지켰을 거야. 국가 시책에 협조를 해야 했지. 독불장군이 없거든. 그건 뭐 받아들여야 되지, 그걸 거스르면 안 되지.

정리 =고은정 기자 kowriter1@iusm.co.kr
자료제공 = 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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