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뉴스 에세이] 심재철-유시민의 ‘1980년 서울의 봄’ 비망록

기사승인 2019.05.15  22:30:00

김병길 주필

공유
19면  
default_news_ad1
유시민의 ‘진술서 자랑’이 공방 불러
심재철 “민주화인사 77명 목 겨눈 칼”
주변 인사들 가세로 진실게임 판 키워

 
39년 만의 ‘서울의 봄 배신자’ 논쟁
기록을 정치공방 삼는 건 위험한 일
안타까운 건 운동권출신 습관적 회귀

 
1980년 5월 15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 대학생 10만여명이 운집해 계엄철폐를 요구했다. 이날 오후 늦게 시위대가 해산한 `서울역 회군'은 민주화운동사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울산매일 포토뱅크)
 
김병길 주필
1980년 봄 대학가는 민주화 열풍으로 뜨거웠다. 5월 15일 오후 3시경 서울역 앞엔 서울 시내 30개 대학 학생 10만 명이 운집해 계엄철폐를 외치면서 신군부가 민주화 일정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신군부의 진압군도 시내 도처에 진주했는데, 이 같은 대결 상황은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대도시가 마찬가지였다. 서울역 광장에 모인 대학생들은 신군부와 최규하 정권에 대한 대규모 성토대회를 열었다. 임시 연단으로 설치한 버스 지붕위에 올라선 연사들이 ‘서울역을 사수하자’고 외치고 시위대는 박수로 호응했다.

총학생회장단은 서울역 광장에 있던 서울대 마이크로 버스와 서울역 대합실 그릴을 임시본부로 정하고 시위 대책 논의에 들어갔다. 오후 8시30분경 시위를 해산하고 철야농성을 위해 교내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8시50분부터 시위대는 썰물처럼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9시40분경 해산에 반대하던 고려대(총학생회장 신계륜) 학생 2천 여 명이 시청 앞까지 행진 한 뒤 해산하면서 서울역 시위는 막을 내렸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서울역 회군(回軍)’이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은 후일 “5월15일 서울역에서 학생들이 퇴각한 것은 결정적 과오였다. 그 같은 결정적 오류가 광주에서의 대학살로 이어져 버렸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심재철을 비롯하여 ‘서울역 회군’에 동의했던 그 누구도 이틀 후에 5.17 계엄확대가 터져 나오고, 또 그 다음날부터 광주에서 대학살이 저질러질 것이라고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당시 학생지도부의 과실이라면, 인간, 아니 한국인이라는 동족의 이성을 믿었던 것일 뿐이다.

그런데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은 민주화운동사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대학생들이 몰아 붙였다면 신군부가 광주에서 강제 진압에 나서지 못했을 것이라는 가정(假定)에서다.

KBS 예능프로에 출연한 유시민 노무현재단이사장은 “1980년 합수부에 끌려가 진술서를 쓰면서 작가로서의 재능을 갖추게 됐다” “수사국장도 감동시킨 문장력” “진술서 잘 써서 비밀조직에 속한 동지들을 지킬 수 있었다”고 자랑할 때만 해도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과의 진실공방이 가열될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의원이 “스물한 살 청년(유시민 당시 서울대학생회 대의원회의장)의 자필 진술서가 다른 민주화 인사 77명의 목을 겨누는 칼이 됐다. 신군부에게 상세 지표를 찍어줄 만큼 그렇게 절박했나”라며 밀고자(密告者) 공방에 불을 댕겼다.

운동권 동지였던 심재철과 유시민 간의 ‘80년 서울의 봄’을 둘러싼 진실 게임은 수사·재판기록 공개와 주변 인사들의 가세로 판이 커졌다.

누가 동지를 배신하고 수사기관 또는 신군부 세력에 부역했는지가 논란의 핵심이다.

1980년 서울의 봄 정국에 대해서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는 부분이 많다. 최규하 당시 대통령은 작고할 때 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반대편에 섰던 민주화운동 세력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다. 계엄 상황에서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고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 보도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수사기록이나 재판기록이 유일한 증언으로 남았다. 그렇다고 그 기록들이 모두 진실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심하게 말하면 수사·재판 기록은 수사기관은 부풀리고 당사자는 축소한 거짓말들의 조합이다. 그나마 그들의 활동을 말해주는 최소한의 팩트가 담겨있기 때문에 민주화운동 연구의 기초자료로 삼는 정도다.

범여권 인사들이 주장하는 “김대중(DJ) 내란 음모사건에서 심재철의 증언이 DJ의 유죄 판결에 결정적이었다”는 주장도 어설프다. DJ에게 중대했던 건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한민통) 수괴 혐의였는데, 1심 판결문엔 그와 관련된 증언을 했음직한 DJ와 가까운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심재철–유시민 기록 전쟁은 간단치 않은 시사점과 위험성을 던지고 있다. 유시민 진술서든 심재철 진술서 공개는 신중해야 한다. 안타까운 건 정치적 대립을 위해 40년 전 기억을 더듬고 있는 운동권 출신들의 습관적 회귀다. 운동권의 해묵은 1980년 ‘서울의 봄’ 배신자 논쟁이 39년이 지나 그것도 엄청난 반전극처럼 되살아 난 것은 코미디 같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유시민은 1년형을 살았다. 이는 민주화 투쟁과는 전혀 무관한 집단 린치와 물고문까지 한 범죄였다. 하지만 유시민에게는 그때 쓴 ‘항소이유서’가 명문(名文)이라며 이름을 얻는 계기가 됐다.

심재철은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돼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은 후 몇 달 복역했다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군대에 징집됐다. 그는 복학 후 운동권 중심부에서 밀려났다고 한다.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회장은 유시민이었다.

김병길 주필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ad28
ad30
default_side_ad1

포토

1 2 3
set_P1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