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지연.  
 

오월 초저녁 바람에 아코디언을 켜요   - 지연

열펌을 했더니 머리카락이 자꾸 말을 걸어요
머리카락 끝에 스프링이 매달려서 달싹거려요
웃음을 봉투에 눌러 담지도 않았는데 오월 초저녁 바람에

입술이 터져서 쏟아져요 휘파람 부는 입술 털보깡충거미와 키스하는 입술 비자나무로 도망가는 입술 다이빙하는 입술 수평선을 부르는 입술 파도를 빨아먹는 입술 일렬횡대로 출렁이는 입술 줄과 줄을 바꾸는 입술 두 칸 떨어진 입술 옆 발차기로 날아와 뒤엉키는 입술 자라나는 입술 상한 시간을 끊어내는 입술 볼륨을 높이는 입술 슬리퍼를 할딱이게 하는 입술 바람과 근친하는 입술 내 마음의 벙커인 입술이 아코디언을 켜요

쓰레기를 버리려고 나섰을 뿐인데 동네를 한참 돌았어요
환호를 잊은 석양 속으로 입술들이 함께 걸었어요

그림=배호 화백

◆詩이야기

걷다 보면 가깝고 먼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혼자 사는 것 같지만 수많은 타자가 나와 함께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저물어가는 것처럼 내 안의 타자들도 저녁을 맞이하겠지요. 오월과 유월의 바람은 서늘하게 푸릅니다. 아코디언을 켜면서 초저녁 바람을 혼자지만 함께 걷습니다. 평안이 사람들에게 섬세하게 깃들기를 바래봅니다.

◆약력

전북 임실 출생. 2013년 『시산맥』신인상으로 등단. 2016년 무등일보신춘문예 당선. 제15회 시흥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건너와 빈칸으로』(실천문학2018) 2018문학나눔우수도서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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