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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조국 수석의 ‘죽창가’와 동학농민 항쟁

기사승인 2019.07.17  22:30:00

김대식 전 울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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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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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청와대 수석의 ‘죽창가’ 언급으로
화제의 중심에 떠오른 동학농민항쟁
탐관오리·일본상인 착취가 봉기 불러

 
봉건적 왕정체제 개혁이 중심 사상
남·북접 동시 봉기는 민족의식 일깨워
외교적 대응 얼마나 중요한지 배워야

 
동학군의 봉기는 무능한 왕정의 개혁과 항일 구국투쟁의 성격을 가진다. 사진은 일본군에 체포돼 재판을 받은 후 서울로 압송되는 동학접주 전봉준.
김대식 전 울산대학교 교수

청와대 조국 수석이 죽창가를 언급함으로써 노래의 소재인 동학농민 항쟁이 화제가 되고 있다.
동학농민항쟁 전에는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재확립을 위한 대원군의 서정개혁에도 불구하고 사회, 경제체제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더구나 조선의 문호개방은 일본과 서양의 경제적 침투로 이중적 압력을 받아 조선사회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농민은 탐관오리의 탐학(貪虐)과 일본인상인의 고리대금의 착취로 이중적 압력을 받아 생활고에 허덕이는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최제우의 동학이 농민층에 파고들어가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를 우려한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이 동기가 되어 동학교도들은 처형된 교주 최제우의 신원(伸冤)과 포교의 자유, 부패관리 처벌 및 척왜양(斥倭洋)을 내세우며 정치운동을 전개했다(1892년).

동학농민 봉기는 탐관오리인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萬石洑)의 수세를 과도하게 부과하고 착복한 사실을 농민들이 전라도 관찰사에게 호소했으나, 거꾸로 관은 농민들을 탄압하여 일어났다. 동학접주 전봉준은 농민들의 절실한 소망을 정부에 대한 저항의 방법으로 선봉에 서서 만석보를 붕괴시키고, 죽창(조국수석이 언급한 죽창가는 항일의 의미가 아니고 부패관리, 즉 정부에 대한 저항을 의미함)으로 무장하여 고부관아를 점령,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사건이 동학 봉기의 시발점이 되었다(1894년).

급보를 접한 정부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按覈使)로 보냈지만, 그는 오히려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동학교도를 체포 및 살해 등 만행을 저지르고 자신은 전주기생과 더불어 밤새도록 가무를 즐겼다. 이를 듣고 분기탱천(奮起撑天)한 전봉준의 지휘에 따라 고부군민의 궐기에서 태인, 부안 등 전라도 일대의 동학농민의 호응으로 동학농민군(동학군)의 세력은 수천 명에 달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제세안민(濟世安民)이란 궁극적 목적을 내세우고 정읍, 고창, 무장, 전주성까지 점령하여 전주성문을 지키게 되었다. 동학군의 무기는 탈취한 약간의 총기와 창과 칼 이외에는 대부분 죽창이나 곤봉이었지만 사기는 왕성하였다.

그러나 곧 전주성을 포위한 정부군의 반격으로 수세에 몰린 동학군에게 새로 부임한 전라감사 김학진이 동학군의 폐정개혁안, 즉 양반관리의 가렴주구 배격, 노비, 천민의 신분평등 및 토지의 균분경작 등 12가지 개혁안을 수용할 것을 약속하였다. 약속한 전주화약(全州和約)으로 농민군의 자치기구인 집강소(執綱所)통치로 잠시 평정사태를 유지했지만, 조선의 식민지화를 노리는 일본의 음모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조선 국왕 고종과 민씨 척족은 동학군이 전주성을 함락시키자, 좌의정 김홍집의 반대를 물리치고(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상흔을 망각하고) 고종은 다시금 청국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하명을 내렸다.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의 천진조약에 따라 청군의 조선파병과 함께 일본도 조선에 군을 급파하였으나 전주화약으로 동학군은 전주성을 떠난 뒤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경복궁을 무단침입한 후 친청민씨정권을 해체하고 대원군을 재집권시킨 후,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조선병탄의 흉계를 드러내었다.

전봉준은 처음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일본상인을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을 폈지만, 이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항일구국투쟁을 목적으로 동학군을 다시 일으켜 일본군과 항쟁하였다. 남접(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동학의 현실참여파) 전봉준의 구국투쟁대열에 북접(동학교리에 충실한 온건파)인 충청도 동학군도 합세하여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전열을 가다듬고 충청도 논산에 집결하여 공주를 향해 북진하였다.

남접과 북접이 하나가 된 동학군은 공주의 관문 우금치에서 일본군의 주력부대 및 관군과 육칠일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하게 되었고, 많은 사상자를 낸 동학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은 동학군 섬멸작전을 펴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를 생포하였다(동학교도들의 밀고로). 체포된 동학군의 수령 전봉준은 부하들과 함께 처형됨으로 동학군의 항쟁과 투쟁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남접 동학군이 주도한 봉기는 탐관오리의 가렴주구, 삼정문란 등 무능한 왕정체제에 대한 반봉건적 개혁사상이 중심이며, 남·북접 동학군이 하나가 된 봉기는 항일구국투쟁으로 배외세적 민족의식을 일깨운 봉기라 하겠다.

동학농민군의 항쟁과 투쟁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무능하고 어리석은 중앙정부의 외교적 대응으로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 발발 구실을 주었고, 승리한 일본이 러시아도 굴복시키어 조선왕조의 몰락을 초래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김대식 전 울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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