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울릉도 어부의 운명적 만남…남편 죽음 한달 뒤 듣고 통곡  
1991년 주민등록 독도로 이전...이후 10년간 울릉도로 나가 산 세월도 

 

남편인 고(故) 김성도 독도 이장이 지난해 10월21일 별세하자 부인 김신열(83) 할머니가 유일한 독도주민이 됐다. 할머니는 ‘독도에서 계속 살고 싶으시냐’는 울산매일 UTV 제작진의 물음에 “응. 평생 여기서 살아 노니까 딴 데는 정 줄 곳도 없고. 겨울에 육지 나가면 여기 오고 싶고…”라고 말했다. 신섬미.임경훈 기자

 

“이 영감시가 와 웃고 있노, 이상하제? 죽는데….”
유일한 독도주민 김신열(83) 할머니는 남편 사진이 든 액자를 손으로 쓸어내리다 발칵 성을 냈다.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20-2. 독도주민숙소 안방 벽에 걸린 사진액자엔 ‘독도 지킴이’ 고(故) 김성도 독도이장이 귀에 입을 걸 요량으로 함박 웃고 있다. 몇 해 전, 어느 신문에 인터뷰 기사와 함께 실렸던 사진이다.
오랜 세월을 독도 바다서 미역 캐고 전복 따며 살았기에 삶 그 자체만으로 독도 근현대사의 산증인 중 한 사람이 되었던 남편. 작년 가을, 그 남편이 황천의 삼도천(三途川)을 건넜다.
초상이 나자 자식들은 신문에 난 그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썼다.

제 영정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허연 이를 훤히 드러낸 채 허허 웃는 폼이 할머니 부아를 돋웠다. 이미 치밀어 오른 부아에, 남편의 사망 사실을 한 달 뒤에야 말해준 ‘딸년’에 대한 괘씸함과, 남편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배웅하지 못한 자책감까지 더해졌다.
“나는 몰랐다 아이가. 저 영감시는 병원에서 죽어뿌고, 나는 죽었는지도 몰르고... 근데 죽는 사람이 와 웃고 있노, 이상하제? 죽는데….”
생전의 '영감시'에게 하듯 액자에 대고 다다다 잔소리를 쏟아낸 할머니의 두 눈에 원망과 그리움이 벌겋게 고였다.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린 할머니는 바다를 내다보는 척 눈물을 말렸다.
울릉도 어부와 제주 해녀가 냉수 한 그릇 떠놓고 혼례 치르고 산 게 50년 세월쯤 되던가. 가슴 애리고 애간장이 녹아들던 야박한 시절도 숱하게 겪었다.  

 

김신열 할머니는 독도주민숙소 안방 벽에 걸린 남편의 영정 사진이 든 액자를 쓸어내리다 벌컥 성을 냈다. 액자 속 사진은 몇 해 전 한 신문사 기자가 ‘독도 지킴이’ 김 이장을 인터뷰한 뒤 신문에 실었던 사진이다. 제 영정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채 허연 이를 훤히 드러내놓고 허허 웃는 폼이 할머니의 부아를 돋웠다. 할머니의 눈에는 이내 그리움과 원망의 눈물이 고였다. 사진 신섬미.임경훈 기자

 

#제주해녀와 울릉도 어부, 독도지킴이 되다
제주 한림읍이 고향인 김 할머니는 울릉도로 물질을 왔다가 남편을 만났다.
3대째 어부를 지내는 집안의 9남매 중 둘째였던 남편은 밑으로 일곱 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난한 가장이었다. 
김 할머니는 냉수 한 그릇 떠놓고 맞절하는 게 다인 혼례를 치르고 울릉도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슬하에 두세살 터울로 1남 2녀를 두도록 가난한 살림은 좀체 펴지질 않았다.  
한때 다섯식구는 독도 1대 주민인 최종덕의 울릉도 자택에 세들어 단칸방에서 복닥거리며 살기도 했다. 
부부가 독도에 정착한 건 1991년, 주민등록을 독도로 옮기면서다.
독도는 1대 주민 최종덕이 1987년 급작스레 별세한 뒤에도 최씨의 딸과 사위, 사촌동생 등이 거주했지만 몇년이 안돼 모두 육지로 나왔고 그 빈자리를 부부가 채웠다.   
하지만 1996년 태풍으로 부부의 보금자리인 서도 어민숙소가 무너지면서 울릉도로 나와 지냈고, 해양수산부가 공사를 마친 2006년, 10년 만에 독도로 다시 들어갔다. 
울릉군은 2007년 남편을 최초의 독도 이장에 임명했고, 2012년 바뀐 <독도는 우리땅> 뮤직비디오엔 ‘주민등록 최종덕, 이장 김성도’라는 가사와 함께 부부의 사진도 새롭게 들어갔다.
독도에 상주하며 봄부터는 소라와홍합, 미역 등을 채취했고 겨울이면 남편과 함께 울릉도로 나와 자식들을 거뒀다. 
부부는 2013년 국세청에 사업자등록을 내고 독도 선착장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티셔츠와 손수건 등 독도방문 기념품을 판매하는 ‘독도사랑카페’를 차렸다. 이듬해부터는 독도사랑카페에서 번 돈으로 국세(부가가치세) 8만 원도 납부했고, 그렇게 독도 1호 국세납부 사업자가 되었다.
김신열 할머니는 "내가 영감시한테 같이 안 살 거라고, 독도로 (이사) 가지 말자고 하이까네 영감은 기어이 여기(독도) 들어와 살아야 한다꼬 해가 어쩔 수 없이 따라왔다"며 "그때부터 독도해녀가 돼서 자식들 벌여 먹여살리고, 돈도 저금하고 그래 살았는데..."라고 회상했다.
독도 바다는 부부의 청춘을 먹고 새파래졌고, 부부가 쏟아낸 눈물 만큼이나 짜디 짰다. 

 

김신열 할머니가 독도주민숙소 앞 바다에서 청각과 고동을 캐고 있다. 한참을 말없이 쪼그리고 앉은 모습이 마치 남편과의 추억을 캐는 듯 아련해 보인다. 사진=신섬미.임경훈 기자

 

#장례 한 달 뒤 알게 된 남편 부음
독한 술을 병째 들이키던 남편은 간암으로 10여 차례 수술을 받았다. 몸이 그 지경인데도 독도에서 산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다 2018년 9월 초 병세가 악화돼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한 남편은 같은 달 19일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10월 21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조용히 숨을 거뒀다. 향년 79세였다.
할머니는 남편의 장례가 끝난 지 한 달 뒤에서야 운명한 사실을 알고 통곡했다. 
자녀들은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김 할머니마저 충격으로 쓰러질까 아버지의 죽음을 말하지 못했다지만 남편의 마지막 임종도, 장례도 못 지킨 할머니는 자식들을 향한 노여움을 쉬 내려놓지 못하는 듯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홀로 독도지킴이'가 된 김신열 할머니는 '독도에 계속 살고 싶으시냐'는 UTV 제작진의 물음에 "응"이라고 답했다. '왜요'라고 다시 묻자 "여기서 오래 살았으니까내 딴 데는 정 가는 데도 없고. 겨울에 육지 나가면 여기로 다시 오고 싶고...근데 난 진짜 영감시 따라 가고 싶다"며 눈물 그렁그렁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시진=신섬미.임경훈 기자

 

지난 8월 말, 독도에서 김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2017년 11월 남편과 함께 독도를 나가 경북 울진의 큰 딸네서 요양하다 21개월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할머니는 ‘독도에 계속 살고 싶으시냐’는 제작진의 물음에 "응"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라고 되묻자 돌아온 답은 이랬다.
"평생을 여기서 살아 노니까 딴데는 정 가는 데도 없고… 근데 난 진짜 영감시 따라가고 싶어.”

뉴미디어부 조혜정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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