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보경 울산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대일 외교 주도·문화외교관 역할 다했던 이예 선생
이예로·이예대교 명명으로 그 공을 기려
울산의 자랑스런 인물인만큼 역사적 의미 재조명을 

 

울산 북구 농소에서 남구 옥동을 지나 울주군 웅촌까지 이어지는 신설국도 7호선을 충숙공 이예(忠肅公 李藝, 1373~1445)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이예로’로 명명했고, 현재 태화동까지 개통된 상태다. 또한 지난 6월 25일 삼호교에서 태화교까지의 태화강 국가정원을 잇는 인도교가 오산대교(이예대교) 하부에 매달기 형식으로 완공되었다. 이 인도교에 태화강을 조망할 수 있는 유리바닥을 설치해 태화강를 내려다보며 스카이워크를 할 수 있어서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다. 이 하부다리가 자라모양의 언덕 같은 ‘오산’ 바로 옆에 있어서 가칭 ‘오산대교’라고도 하고 ‘이예로’를 잇는 다리이므로 ‘이예대교’라고도 한다. 이렇게 길을 잇는 도로와 다리에 ‘이예’라고 명명했는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울산 남구 달동 문화공원에는 2005년 2월에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던 것을 계기로 2006년 이예 선생의 동상을 세웠으며, 2010년엔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충숙공을 선정하여, 조선왕조실록에 최초로 등장하는 울산 사람이자 조선 최초의 외교관이었던 조선통신사 충숙공 이예 선생의 업적을 기리게 되었다. 이예의 주요 업적은 조선 건국 초부터 왜구의 침입으로 불안정했던 일본과의 관계에서 대일외교를 주도했고, 세종때는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함으로써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일본식 자전(自轉)물레방아를 들여오고 대장경을 전달해주며 문화외교관으로서 양국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1373년 울산에서 태어난 이예는 8세에 모친이 왜구에 끌려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향리로 일하던 1396년(태조 5년)엔 울산 군수 이은 등이 왜구에게 인질로 잡혀가자 자원하여 동행해 군수를 무사히 귀환시킨 공을 인정받아 아전 신분을 벗어나 1401년부터 본격적인 외교관 활동을 시작했다. 1401년에는 일기도(壹岐島)에서 피로인 50명 송한, 1406년에도 70여명 송환, 그 후 1410년까지 해마다 파견되어 조선인 포로 500여명을 송환했다. 1416년엔 태종에게 유구국(琉球國)의 조선인 포로 송환을 먼저 제의하고 이 일을 맡아 천 킬로나 떨어져 있는 험지(險地)인 유구국까지 가서 44명의 조선인을 송환한 사명감 있는 외교관이었다.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을 할 때에도 중군병마부수(中軍兵馬副帥)로 임명되어 탁월한 외교활동으로 공을 세웠다.

약 42년의 공직생활동안 멸사봉공(滅私奉公)한 외교관으로 대마도나 오키나와 등에 40여회 파견되면서 교토 무로마치 막부의 일본국왕들도 만나며 활발한 대일외교를 펼쳤다. 무려 667명의 조선인 포로를 송환시킨 후, 1443년 71세의 노구(老軀)의 몸임에도 애족정신으로 대마도에 잡혀 있던 조선인 송환을 위해 파견을 자청했고 애민정신의 세종대왕으로부터 허락을 얻고 간 마지막 사행(使行)에서 대마도주와 계해약조를 맺었다. 조선에 입항하는 일본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문인(文引) 제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명문화(明文化)시킨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왜구의 침범을 막고 평화통상의 시대를 열었던 명실상부 조선 최고의 외교관이었던 이예는 관직이 종2품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고, 1445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약 465년 뒤인 1910년, 순종이 이예에게 '충숙공'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했다.

울산 학성이씨의 시조인 학파(鶴坡) 충숙공 이예는 후손들에게 누대로 귀감이 되었으며, 1737년에는 유림의 공의에 의해 황용연(黃龍淵) 건너편에 ‘용연사(龍淵祠)’를 창건해 충숙공을 배향(配享)하다가 1782년(정조 6)에 웅촌으로 옮겨 세워지면서 사호를 ‘석계(石溪)’라 하여 현재 ‘석계서원’이 되었고, 2001년에는 옛 ‘용연사’ 유허지인 남구 신정1동에 ‘용연서원’을 복원해 동재인 명성재에 이예 선생의 외교 업적에 대한 자료 전시관을 두었다.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용연서원은 봄에, 석계서원은 가을에 향사(享祀)를 봉행(奉行)하고 있다. 한편, 지난 7월 1일엔 1459년 세조실록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선 통신사로 활약하다가 풍랑으로 수장된 안타까운 기록이 나오는 충숙공의 아들인 이종실(李宗實)의 공적비가 울주군 온양읍 고산리에 세워졌다.

‘이예로’와 같은 도로가 지역과 지역을 이어주고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것처럼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을 과거의 역사와 이어봄으로서 울산의 자랑스런 인물인 이예의 일생이 주는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해 볼 수 있다. 외교 일선에서 국익을 증진시킨 충숙공의 업적을 되짚으며, 신뢰를 바탕으로 상호 배려와 협조로 이 어려운 코로나상황 뿐만 아니라 경직되어 가는 대일외교관계의 매듭을 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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