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환 연재소설】 계변쌍학무(49)

                                                                                                                                                   그림 : 배호

 

“악!”

신라장수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터졌다. 고구려장수가 빠르게 칼을 잡아 빼자 붉은 피가 솟구쳤다. 양쪽진영의 군사들이 모두 얼어붙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니 시합일 뿐이었다.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시합에서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칼날을 거둔 고구려 장수는 고구려의 왕세자에게 인사를 올린 후 자기 자리로 들어갔다. 모두가 얼어붙어 있는데 고구려의 왕세자 혼자 박수를 쳤다. 신라의 왕세자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옆구리를 찔린 장수를 데려오게 한 뒤 지용국사를 옆으로 불러 귓속말로 의견을 나누었다.

“내가 저놈하고 직접 붙어보는 게 어떨까요?”

“참으셔야 합니다. 지금은 지는 게 이기는 것입니다. 지금 고구려왕세자를 죽이게 되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꼬이게 됩니다. 내일을 생각해서 참아야 합니다. 오늘은 모두 항복하는 걸로 하고 마무리를 하도록 하시지요.”

왕세자는 지용국사의 충고에 고개만 무겁게 끄덕였다. 쓰러진 장수를 데려와 갑옷을 벗기고 상처를 살펴보니 잘만 하면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왕세자는 다음 시합이 예정되어 있는 장수들을 데리고 앞으로 나갔다. 일렬로 줄을 서서 고구려의 왕세자 앞에 고개를 숙였다.

“오늘 시합은 저희들이 졌습니다. 군사들을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내일은 마상무술을 겨루도록 합시다. 각 진영에서 기병 오십을 뽑아 백제군이 지키고 있는 상당산성까지 달려가 화살을 성루에 한 대씩 박아놓고 돌아오는 걸로 합시다. 오십 명 모두가 돌아와야 하고 한 사람이라도 돌아오지 못하거나 늦게 돌아오면 지는 겁니다.”

“좋소. 그것도 재미있겠군. 백제놈들도 혼이 나겠군.”

일은 신라왕세자가 의도한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고구려 왕세자는 어제 대회에서 진 것에 대한 분풀이를 모두 한 셈이었다.

“오늘 시합에 승리한 장수에게 조그만 상을 내릴까하오.”

신라의 왕세자는 환두대도 한 자루를 고구려 진영으로 가지고 나갔다. 자루에 금장식을 한 고급스런 칼이었다. 키가 작은 고구려 장수가 고개를 살짝 숙여 자국 왕세자의 승낙을 기다렸다. 고구려의 왕세자로서는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새들은 바닥에 누워 자는 법이 없다.
              앉아서 자는 새는 있어도
              머리를 바닥에 대고 자는 새는 없다. 

 

고구려장수가 왕세자 앞으로 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라 왕세자는 칼자루를 잡고 칼끝을 고구려장수 쪽으로 내밀었다. 정상대로라면 칼집과 자루를 동시에 잡고 칼끝이 옆으로 향하게 건네야 했다. 고구려 장수는 무언의 감정이 섞여 있는 선물인지 느낄 수 있었지만 군말 없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7.북천

석가치의 집에서 밤을 보낸 하문은 이른 새벽 눈을 떴다. 아령은 윗목에서 옷을 입은 채 잠들어 있었다. 석가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밖으로 나가려던 하문은 돌아서서 잠든 아령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호흡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조용히 잠들어 있는 아령의 모습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가까이 다가가 이마를 살짝 짚어 보았다. 약간의 신열이 느껴졌다. 그러나 숨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평온한 잠에 빠져 있었다.

다시 밖으로 나가려던 하문은 주춤했다. 잠든 아령의 모습이 죽어있는 새의 모습으로 보였다. 새들은 잠을 잘 때 바닥에 누워 자는 법이 없다. 앉아서 자는 새는 있어도 머리를 바닥에 대고 자는 새는 없다. 하문은 그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잠든 아령의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밖으로 나섰다.

좁은 툇마루 위에 석가치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어제 밤과 다르게 백발의 머리를 뒤로 넘겨 깔끔하게 묶고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는데 자세만으로는 서라벌의 전경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문은 방해가 될까 싶어 가만히 석가치의 옆에 앉았다. 똑같이 가부좌를 틀고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새벽안개 속에 살짝 가려져 있는 서라벌의 모습이 신선경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멀리 월성의 기와지붕과 숲이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져 있었다. 그 월성에서 나와 월천을 건너는 월정교의 기다란 지붕도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용마루 위에 한 마리 두루미가 앉아 있겠지만 너무 멀어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멀리서 바라보기에 그저 미물에 불과한 새 한 마리가 많은 사람들을 불안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계속>

 

김태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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