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김병길 주필 회상록] 뭐 하러 왔노 <16> 기생 관광·‘김일성 피살’ 오보

기사승인 2021.04.07  22:30:00

김병길 주필

공유
18면  
default_news_ad1
1986년 피격 사망 오보로 눈길을 끈 김일성 주석이 1987년 5월 24일 방중때 베이징에서 텐진항으로 출발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중앙일보 발췌

 

88올림픽 전 적자재정 심각하자 ‘기생 관광’ 부활 시켜 
1986년 ‘김일성 피격 사망’ 48시간만에 오보로 드러나
의사 김만철 일가 11명 ‘따뜻한 남쪽 나라’로 탈북

 

김병길 주필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유치는 광주학살을 저지른 5공 정권이 그 ‘원 죄’를 덮기 위한 최상의 카드였다.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중국의 금메달 94개에 1개가 모자라는 93개를 따내 2위를 차지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 앞에선 ‘민주화’도 무력했다.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 교과서도 그런 여론 조작에서 비켜갈 순 없었다. 

5공 정권의 여론 조작 시도로 인해 고달픈 것은 동원된 학생들이었다. 언론사에는 연일 ‘보도지침’이라는 것이 내려졌다. 1986년 6월 18일자 보도지침은 “‘대통령 해외순방 7차례 동원된 학생 182만명’이란 기사는 보도하지 말 것”이었다. 이처럼 ‘학생 동원’은 5공 여론 조작의 기본 축을 형성했다.

한편 88서울올림픽 개최일이 다가오면서 전두환 정권은 적자재정에 대한 고민이 심각했다.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TV 방영권료로 총 6억달러 이상의 수입을 예상했지만, 협상 결과는 참담했다. IOC의 몫을 제외한다면 2억달러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때 꺼내든 해결책이 박정희 시대의 ‘기생 관광’이었다. 정부는 물론이고 올림픽 조직위원회까지 ‘기생 관광’ 추진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유명 여성 연예인들까지 동원한 혐의가 드러나자 ‘매춘 관광’으로 비화됐다. 1985년 1월 20일자 한국일보에는 <일지(日誌) 선정적 화보 파문-한국연예인에 여대생 특집>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일본의 주간지 『헤이본 펀치』에 실린 ‘한국 기생 관광’ 특집기사가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며 자세한 내용을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유명 잡지에 낸 광고에는 요정 여성들이 외국 남성들에게 술안주를 먹여주는 사진이 천연덕스럽게 실렸다. 이에 격노한 여성단체들은 본격적으로 ‘기생 관광’ 반대 운동에 나섰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생 관광 수입은 크게 늘었다. 

1986년 11월 16일 ‘특종’ 보도에 목 말랐던 언론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조선일보가 ‘김일성 사망’을 알리는 신문 호외를 뿌렸다. “김일성이 총 맞아 피살됐거나 심각한 사고가 발생, 그의 사망이 확실시 된다. 휴전선 이북의 선전마을에는 16일 오후부터 반기 (半旗)가 게양됐다. 휴전선의 북괴군 초소 2개소에선 이날 ‘김일성이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했고, 4개소에선 ‘김정일을 수령으로 모시자’는 대남방송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도쿄발 기사는 전 세계 ‘핫 뉴스’로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18일부터는 <김일성 피격 사망>이라고 단정해 보도했다. 조선을 제외한 신문사마다 ‘물먹었다’며 도쿄 특파원을 질책했다. 그러나 이 ‘세계적 특종’은 첫 보도 이후 48시간 만에 오보인 것으로 밝혀져 ‘세계적인 오보’로 기록되고 말았다. 

이 오보는 11월 15일 일본공안조사청이 ‘김일성이 암살됐다’는 첩보를 입수한 것에서 비록됐다. 이 소식이 일본 증권가와 외교가에 전해져 관심을 끌던중 11월 16일 조선일보가 ‘김일성 피살설’을 도쿄발로 보도한 것이었다. 

다음날인 17일 오전에는 국내의 모든 언론이 앞다퉈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날인 18일 오전 10시에 김일성이 몽고 공산당 서기장 잠빈 바트문흐를 영접하기 위해 평양공항에 나타나면서 ‘세계적인 오보’가 되고 말았다.

이 해프닝은 ‘헤이그 밀사 사건’ 당시 이준열사가 현지에서 분사(憤死)했다고 보도한 대한매일신보의 오보에 이어 한국 언론 사상 최대 오보로 기록됐다.

해가 바뀌고 1987년 1월 15일 새벽 1시에 북한 청진의대병원 의사 김만철(46)일가 11명이 청진호(50t)를 타고 북한을 탈출했다. 청진호는 1월 16일 동해 대화퇴 부근에서 엔진고장으로 표류하다가 20일 오후 6시께 일본 후쿠이 외항에 도착했다. 일측 조사에서 김만철 일행은 귀착지를 “따뜻한 남쪽 나라”라고  밝혀 한국행 의사를 밝혔다.

한국 외무부는 김만철 일가의 한국 인도를 요청했다. 북한은 김만철 일가를 무조건 북측으로 송환할 것을 요청, 북한 경비정을 공해상에 대기 시키지까지 했다. 결국 김만철 일가는 2월 3일 일본 정부가 대만측과의 협의를 거쳐 대만행을 결정했다. 2월 7일 새벽 김만철 일가는 오키나와를 거쳐 대만에 도착했고, 이튿날 오후 대만을 출발, 오후 10시에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다가 25일만에 막을 내린 김만철 일가의 망명은 분단 후 첫 가족단위의 탈북이자 목숨을 건 ‘세기의 탈출’ 드라마였다. 

한편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은 가열되고 있었다. 전두환은 3월 25일 청와대에 민정당 주요 당직자들을 불러놓고 중대 발표를 했다. 자신의 후계자로 민정당 대표위원 노태우를 택했다고 밝혔다.

이때 술잔을 들고 노태우가 한 말이 웃겼다. “각하를 통일영도자로 모시는 잔입니다. 오늘 민정당을 위해서는 영광스러운 자리인데, 감기드시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다음날 국민들은 또 하나의 ‘5공쇼’ 결정판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김병길 주필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ad28
ad30
default_side_ad1

포토

1 2 3
set_P1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bottom
#to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