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판도라 포스터.

 

김진영 편집이사

국정농단 편승 정권무능 오버랩 판도라
탈원전코드 맞춰 흥행몰이 원전 반감 ↑
적자 한전, 폭염 걸고 전기료 인상 시동

 

유월에 폭염이 땅을 태우더니 토네이도급 강풍이 산하를 흔든다. 이상기후는 이제 일상이 됐다. 어느날 갑자기 안드로메다 어디쯤에서 날아오던 혜성이 지구를 덮치는 아마겟돈이거나 감당할 수 없는 대륙 곳곳의 대지진으로 현대판 노아의 방주에 올라타는 재난영화 '2012' 이야기는 이제 영화 속의 한 장면만은 아니다. 지난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해안이 흔들렸다. 동일본대지진이다. 광안대교가 무너지는 영화 해운대가 1,000만 관객을 공포에 떨게 한 위력이 여진처럼 남아 있을 무렵, 후쿠시마 해변이 쓰나미로 뭉개졌다. 모든 것을 삼킬 듯 휘몰아치는 해일과 겹쳐지는 후쿠시마 원전의 무기력한 모습은 그날 시 순간을 기억하는 모든 세계인에게 충격으로 각인됐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2014년 4월 16일, 전라남도 진도 앞바다 관매도 부근 맹골수도에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바로 그 시간 세월호에는 제주의 봄을 수채화로 그리고 있던 경기도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아침잠에서 막 깨어난 시간이었다. 학생과 교사, 그리고 일반승객 30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그 뒷이야기는 더 기가 막힌다. 세월호는 그냥 침몰한 게 아니라 음모론이 있다는 이야기가 맹골수도에 깔린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가 꾸려져 무려 8년간 9번의 반복되는 조사를 거듭했다.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사참위는 진실은커녕 불신과 음모론의 수증기만 확산시켰다. 그로 인한 조사 비용은 3,000여 명 사망한 미국 9.11테러 조사비 1,500만 달러(약 163억원)보다 약 4배가 많은 600여억원이다.

다시 두 해가 지난 2016년 10월, 태풍 차바가 울산을 흔들었다. 태화강이 잠겼고 태화동과 우정동 일대가 물바다가 됐다. 때마침 9월에는 경주에서 땅이 흔들렸다. 9.12 지진이다. 경주시 남남서쪽 8km 지역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5.8 지진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대한민국이 공식적으로 지진을 관측한 1978년 이후 역대 가장 강력한 지진이 여진으로 흔들릴 때 태풍까지 덮친 초유의 재난 상황이었다.

영화 해운대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인근의 인도양에서 발생한 초강력 지진과 쓰나미가 모티브가 됐다. 재난의 현장을 영상으로 접한 부산출신 영화감독 윤제균의 머릿속에 해운대와 광안대교가 거대한 쓰나미에 뒤엉키는 상상이 스크린처럼 펼쳐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광안리 짠 내와 해운대 100만 수영객을 여름마다 보고 자린 부산 사내라면 한 번쯤 영화 속 해일이 덮쳐 죽어라 장산까지 빛의 속도로 내달리는 상상을 해볼 수 있는 일이다. 윤제균은 그 재난의 상상 속에 인간애를 담았다.

후쿠시마의 원전 재앙에서 동기부여를 받은 영화 판도라는 앞선 재난 영화들과 결이 달랐다. 탈원전의 깃발을 흔들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첫 번째 대선에 나선 2012년 12월 영화감독 박정우는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 영화감독 40인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판도라를 만들기 전의 일이었다. 연가시로 시작된 한국형 재난영화로 참신성을 인정받던 신예감독 박정우의 머릿속엔 초유의 대난에 대처하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리더가 그려졌을 무렵이었다.

동일본대지진과 원전 사고는 재난에 대처하는 일본 정부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사고 당시 일본 정부는 사고의 수준을 레벨 7로 발표했다. 1986년 발생한 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동일한 등급이었다. 최고수준의 위험상황에서 정부의 대처는 허둥거렸다. 1호기에서 수소폭발이 일어나고 3호기에서도 수소폭발이 이어졌다. 고장난 냉각수를 대처하는 방법이 잘못돼 태평양의 방사능 오염 공포가 터졌고 상황은 계속 악화됐다. 바로 그 상황에서 영화 판도라는 절묘한 교차점을 찾았다. 재난에 대처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이다. 국무총리(이경영 분)는 국민 전체가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 국민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자세로 사건의 철저한 은폐를 지시하고, 정치경험이 적은 젊은 대통령(김명민 분)은 국무총리와 힘겨루기를 하다가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을 막을 수 있던 골든타임을 놓쳐버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을 메시지 한쪽에 담고 싶었던 영화감독 박정우는 "시국을 빗대 영화를 계획적으로 만든 건 절대 아니고 단지 원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지만 국가는 없고, 국민만이 있었던 메시지는 박근혜 7시간과 문재인 캠프의 탈원전 바람을 업고 흥행몰이를 했다.

느닷없이 찾아온 이상기후와 폭염에 전기요금이 낯을 붉히고 있다. 한국전력과 산업통상자원부는 3분기 전기 요금을 kWh(킬로와트시)당 5원 올린다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에 대한 비난을 피하려고 억눌렀던 전기 요금을 정상화하고, 최근 국제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연료비 상승분을 반영하기 위한 차원이라는 설명이다. 한전의 책임자인 정승일 한국전력 사장은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전기 요금 인상을 열 번 요청했지만 단 한 번만 승인받았고, 전기 요금 인상이 지연되는 과정에서 한전 적자가 30조 원 가까이 이르렀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판도라의 흥행이 정점에 오를 무렵 광화문에서는 촛불을 든 수십만의 군중이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촛불이 횃불로 바뀔 무렵 대통령에 오른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고리 원전 1호기에 대못을 쳤다. 그 자리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은 "월성1호기도 가급적 빨리 폐쇄하겠다"는 탈원전 선언을 공식화했다. 새정부가 노후 원전을 조기 폐쇄하더라도 원자력안전위원회의 폐쇄 허가가 나기까지 2년 반 정도는 계속 가동한다를 로드맵을 가진 한수원과 관련정부 실무진은 당황했지만 새정부를 향해 주먹을 쥘 순 없었다.

그해 겨울부터 여름까지 벌어진 대한민국 원전의 흑역사는 영화 판도라로 상징되는 이미지 정치의 치부다. 우리가 기억하는 판도라는 금기의 상자를 연 사악함의 상징이지만 감독은 애써 마지막 순간 닫아버린 상자의 뚜껑 아래 깔딱거리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영화 판도라가 그 사악함과 희망의 양면성을 이야기하려 했다면 재난영화 자체로 남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설핏 스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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