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7월 11일 부산일보가 전면 파업에 돌입해 16일 편집권 독립을 쟁취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발췌
김병길 주필

‘대마초 사건’ 겪은 조용필 ‘오빠 부대’ 피해 비밀결혼
신문창간 붐, 순복음 교회·통일교에서도 일간지 창간
언노련에선 중앙일보 ‘편집국장 직선제’ 지지 성명

시대가 보여주는 문화현상은 노태우 정권 들어서 획기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데뷔해 인기를 누렸던 조용필은 1977년 제2차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가요계에서 추방되어 잊혀진 가수였다. 그러나 79년 12월 해금되자 1980년 <창밖의 여자>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조용필은 이른바 ‘오빠 부대’의 극성을 피해 1984년 3월 1일 극비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7명의 주간지 연예기자들에게만 알리고 경기도 남양주군 봉선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조용필의 노래들은 나름대로 1980년대의 시대 상황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1982년 네번째 앨범에 실린 <생명>은 명백히 광주학살에 대한 분노를 담은 노래다. 1985년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선 투쟁의 외로움을 노래했다. 
TV드라마 <모래시계>는 잘생기고 정의로운 깡패, 성실하고 진지한 검사, 못생기고 교활하고 의리없는 깡패를 등장 시켜 시대 상황을 묘사해 드라마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한편 언론계는 민주화 바람을 타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어느날부터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신문이 창간됐다. 6·29선언 이후 신문뿐 아니라 새로운 잡지 등 정기간행물이 속속 등장했다.
1989년 5월 말 기준으로 일간신문이 32개에서 66개로, 주간신문이 201종에서 647종으로, 월간지가 1,203종에서 1,934종으로, 기타 격월간지·계간·연간 등이 800종에서 1,151종으로 늘어났다. 6·29선언 당시와 비교해 무려 74%가 늘어났다.
중앙일간신문은 88년 5월 15일 국민주식 방식의 「한겨레신문」, 88년 12월 10일 순복음교회에서「국민일보」, 89년 2월 1일 통일교에서 「세계일보」를 창간했다. 1990년에는 평화방송국, 불교방송국, 교통방송국 등 특수방송국이 개국했다. 
또 재벌의 언론사 소유 바람이 불기 시작해 현대가 「문화일보」를 창간했다. 잇달아 한국화약이 「경향신문」을, 롯데가 「국제신문」을, 대우가 「항도일보」(「부산매일신문」으로 개재)를, 대농이 「내외경제신문」과 「코리아헤럴드」를, 갑을이 「영남신문」을 각각 인수했다. 
이에 앞서 부조리를 없앤다는 전두환 정권이후 정부의 압력으로 중앙일간신문의 경우 봉급 인상이 획기적이었다. 듣기로는 무조건 당시 최고 대우를 했던 종합상사 수준에 맞추라고 압박했다. 
88년 6월 6개 중앙일간지의 기자 초임이 월급여 50만원에서 70만원 선이었다. 연봉으로 치자면 900만원에서 1200만원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대졸 이상 사무직, 전문기술직 종사자들의 평균임금의 2배에 이르는 수준이며 대학교수 급여와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필자가 근무했던 중앙일보·동양방송의 경우 TV방송 호황에 힘입어 연말 보너스를 1,000%까지 받은 기억이 난다. 
언론 자유화의 물결에 부작용도 뒤따랐다. 4·19 이후 사이비 언론의 폐해가 가장 극심했던 때는 1989년과 90년이었다. 89년에만 해도 91명의 사이비 언론인이 구속되었다. 
공보처는 이런 실정을 내세워 90년 2월 사이비 언론 규제책의 일환으로 1972년에 생겼다가 6·29선언 이후 폐지된 기자 ‘프레스 카드제’ 부활까지 검토했다.
사이비 언론단속은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지만 권언유착을 통해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 창출의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체제옹호적 사이비 언론은 여전히 성역을 누렸다.
푼돈을 뜯어내는 사이비 언론의 부패가 ‘생존형 부패’라면, 제도권 언론의 부패는 어느덧 ‘향락형’을 넘어 ‘축재형 부패’로까지 나아갔다.
한편 언론노동운동은 신문과 방송이 안고 있던 모든 문제들을 개혁하기 위해 애를 썼다. 언노련은 89년 1월 14일 중앙위원회에서 89년을 ‘언론해방투쟁 원년’으로 선언했다. 89년의 운동 목표로 권력과 자본, 비리로부터의 해방을 내세우는 한편 구체적인 실천 목표를 의식개혁을 통한 비리 청산, 편집·편성권의 완전한 독립, 민주운동단체와의 연대 강화 등으로 정했다.
89년 언노련은 ‘공안정국’하에서도 산하단체에 대한 지원, 공정 보도 및 언론 자유 쟁취 투쟁, 여타 노조 및 단체와의 연대 강화 등 폭넓은 활동을 벌였다. 산하 회원사에 대한 지원 활동으로는 89년 3월 「중앙일보」가 편집국장 직선제 등을 둘러싸고 쟁의발생 신고서를 내자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공정보도를 위한 활동으로는 7월 29일부터 ‘민주언론 실천위원회’가 지역별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언노련의 기관지 「언론노보」는 여의도 농민시위와 울산 현대중공업 사태, 중국 천안문 사태 등과 관련 편파·왜곡 보도 등을 꾸준히 지적했다.
88년 올림픽 특수 이후 일간 신문들의 증면 경쟁이 계속되었다. 과거 신문 지면의 증가는 중앙지가 1962년에 석간이나 조간신문의 단간제 하루 8면 발행에서 시작해 80년 1월 12면, 88년 하루 16면 발행으로 늘어나는데 그쳤다. 그러나 1989년 「한국일보」의 휴일판(월요판) 발행과 10월 「조선일보」의 하루 20면 발행에 이은 증면 경쟁은 90년 3월부터 대다수 중앙일간지로 확산되었다. 주 1회 휴간제가 없어지고 연중무휴 하루 20면 발행 체제가 시작되었다. 또 90년 7월부터는 중앙지들은 하루 24면 체제에 들어갔다. 
80년대 말부터 신문들은 편집·제작의 전산화를 위한 CTS 시설에 수백억원씩 투자했다. 중앙지들은 앞다투어 지방에 인쇄공장을 설치해 지방독자 확대에 열을 올렸다.
이처럼 신문들의 치열한 확장과 경쟁이 시작됐으나 노태우 정권 하에서의 언론 민주화는 왜곡된 시장 민주화였을 뿐 근본적인 변화에는 다소 미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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