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

 

김동수 관세사·경영학 박사
김동수 관세사·경영학 박사

 1965년 6월 22일! 한·일 협정이 마침내 마무리돼 교환공문 작성과정 때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포기하라는 의견을 물 밑으로 제시해 왔다. 이때다. 박정희 대통령(이하 박정희)은  "독도문제는 한·일 회담의 의제에서 아예 제외하라"고 도쿄에 있는 외무부 장관 이동원에게 지시하면서 "본건은 한국의 정치적인 안정과 안보문제가 걸린 중대한 문제임으로 만약 한국 측이 수락할만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한·일 회담을 중지해도 좋다"는 훈령을 엄히 내렸다. 박정희의 이 단호한 훈령에 일본 정부는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하겠다는 안(案)을 거뒀고, 독도 명칭을 교환공문에서 삭제했다.

 이 당시 독도 문제를 두고 일본이 막후에서 시도한 이른바 뒷이야기를 이에 소개한다. 한·일 협정이 물 밑에서 논의되던 시기, 일본은 한 명의 특사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다. 고토 마사유키란 자다. 

 일본 육사(陸士)의 박정희 선배이며 일본 정계와 재계를 연결하던 일본 최고의 우익 로비스트이자 다혈질적인 기질로서 쇼와 시대 최고의 ‘사무라이’라고 자칭하는 인사였다. 실제로 큰 체구와 특유의 거친 말투 그리고 매서운 눈빛으로 어떤 상대도 설득 협박하고야마는 거물이었다.

 고토의 임무는 미도리 제약회사의 신기술을 한국에 이전하는 대가(代價)로 독도를 빼앗아 온다는 외교책무였다. 이 당시 일본 정계는 고토 특사라면 독도문제는 해결된다고 보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런 고토가 드디어 박정희와 독대하게 됐다. 고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장군에 대한 기억(일본 육사시절)이 나에게는 별로 없소. 아마 조용한 생도였던 모양이군요" "당신이 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 내가 여기에서 당신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요. 본론을 이야기 하시오" 박정희의 응답이다. 

 "역시 듣던 대로시군요. 아무튼 장군(박정희를 가르킴)! 바보 같은 놈들(일본 정치인을 가르킴)이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말) 같은 하찮은 문제로 한·일 관계 개선의 발목을 붙잡으려고 하오. 박 장군께서 조국을 부흥시키려면 무엇보다 의약(醫藥)관계의 최신기술이 필요할 것이요. 내일 당장 신문을 이용해 선전하십시오. 일본의 최신 기술을 이전 받기로 했고 공장도 지을거라고 말이요. 그러면 민심(民心)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요. 그리고 다케시마 같은 것은 바보 같은 놈들에게 물고기나 잡으라고 줘버리시지요"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정색을 했다. "이봐 당신! 나는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한 사람이요. 지금 당신이 나에게 명령하는 것이요.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내 조국(祖國)과 함께 하기로 결심한 사람이요. 그것이 독도(獨島)이던 돌<石> 한 덩이던 내 조국의 것이라면 나는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이요. 군인인 내가 조국에 할 수 있는 것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소."

 박정희의 엄중한 자세에 고토는 기가 질렸다. 고토는 수많은 야쿠자들, 수많은 정치거물들, 정치 깡패들을 상대하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두려움을 이 작고 깡마른 체구의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받은 것이다. "장군 흥분하지 마시오. 장군의 조국에 대한 충정(衷情)은 나도 이해하오. 하지만 작은 것을 보느라고 큰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도 장군답지 못한 것 아니겠오. 대의를 보시지요. 자칫하면 모든 것(한·일 협정에 의한 차관 등)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소" "이봐 당신 아까부터 자꾸 나에게 훈계하려고 하는데 그 태도 더 용서하지 않겠소… 당신도 사나이면 나와 술 한잔 하며 사나이답게 이야기합시다. 서로 술이 취해 싸움이 된다면 덜 얻어맞은 자의 말을 따르기로 하면 될 것 아니겠소. 어차피 당신은 나와 싸우기 위해서 온 사람 아니오" 

 술자리에서 박정희는 목소리를 낮춰 고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와 나의 부하들에게 즐거운 일이 무엇인지 아시오? 이 시대 이 땅에 태어난 덕분에 우리는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을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요. 사나이로서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겠소. 고토 선생! 일본에 돌아가서 전하시오. 다들 목숨을 걸고 조국을 부흥시켜 일본 못지않은 나라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앵앵거리지 말라고 말이요"

 이 말을 들은 고토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고 말았다고 훗날 술회했다. 그것은 박정희의 눈빛에서 사나이의 진짜 미학을 찾았다는 유쾌함과 비장함이었다고 했다. 동경으로 돌아온 고토는 일본정계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이 여보게들! 한국의 박정희 장군은 그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서 죽기로 했다고 말했소. 당신들 면상을 보아하니 어느 누구도 다케시마를 찾을 수 없겠어!"

 박정희가 암살되던 날, 고토는 도쿄 아카사카의 한국 술집에서 술에 취해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고 한다.

 「パガヤで!...上泉神藤井羽八つらとしょがなだな...持分のオヤベンをコロシテ助げます。おやじといちしょじゃなんですか...」 이하 (  ) 안은 고토가 말한 전문 번역문이다.

 (병신들! 조선 놈들 어쩔 수가 없구나 자신들의 두목을 죽여버리면 어쩌잔말이야… 아! 즐거움이 없어지고 말았구나, 눈을 뜬 조선 호랑이가 이런 쓰레기 같은 원숭이들을 훌륭하게 단 칼에 베어 복수하는 그것이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병신들 마지막 사무라이가 죽었단다 죽고 말았단다)

 경제 발전으로 일본과 수출 경쟁을 했으며 미국이 한사코 가로 막고 있는 핵(核)을 가지려고 했던 박정희의 꿈! 그 꿈의 한국의 사무라이(박정희)가 죽고 말았다는 고토의 울부짖음도 거의 함께 끝나고 말았다. 

고토가 사랑하던 손녀를 교통사고로 잃은 충격으로 자살한 것이다. 고토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박정희 친필휘호 「憂國衷情(우국충정)」이 쓰여진 수석(水石)이었다. 김동수 관세사·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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