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숙 시인 오영수문학관 아카데미 회원
조정숙 시인 오영수문학관 아카데미 회원

 오랜만에 찾은 통도사, 무풍한솔길이다. 절 입구까지 춤을 추듯이 구부러져 있는 1.6㎞의 소나무 숲길이다. 불어오는 찬바람과 함께 붉은 노송들의 모습이 가지각색이다. 하늘을 오르며 춤을 추는 나무, 우아하게 발레를 하는 나무, 지팡이를 짚고 방명록이 적힌 바위와 대화하는 나무, 허리를 굽혀 물속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나무 등이 ‘멋지다’는 감탄사를 저절로 나오게 한다. 덤으로 계곡 물소리는 춤추는 소나무의 반주다. 촉촉한 솔향기는 머리를 맑게 한다. 

 이런 모습과 다르게 가끔 보이는 느티나무와 다른 나무들은 아직도 동안거에 묵언 중이다. 성보 박물관 앞에는 늙은 나무가 여러 대의 수액을 꽂고 있다. 사천왕문 앞에 왔을 때는 천년도 더 산 느티나무가 죽어 밑둥치만 남아 있다. 이 나무는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으로 그늘 공양을 만들었다. 가을에는 알록달록 색 보시를 해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차가운 눈이 내려도 겨울을 꿋꿋이 이겨냈다. 몇 년 전까지 보호막 속에서 수액을 맞으며 치료를 했는데 살아나지 못했다. 

 죽은 나무를 보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자식은 생명으로 잉태되는 순간부터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살아간다. 어머니는 자신의 몸과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자식을 돕는다. 밑둥치에 껍데기만 남은 나무가 자식들을 위해 속을 다 내어준 어머니 같다. 죽기 직전까지 곤충과 벌레들이 진액을 다 빨아 먹었으리라. 힘이 없어 병해충의 침입도 막지 못했을 것이다. 검은 이끼를 덮어쓰고 있는 모습이 힘든 시간을 이겨내다 죽은 것 같아 안타까웠다.  

 사대천왕께 인사를 하고 절 안으로 들어갔다. 절 안은 밖과는 대조적으로 화사했다. 은은한 매화 향기가 바람결에 훅 불어왔다. 코끝이 아찔할 만큼 매혹적이다. 수백 년을 품어온 꽃이 한꺼번에 피어오르니 정신이 아득하다. 코로는 부족해 가슴과 피부로 맡아본다. 향기에 취하고 활짝 핀 꽃을 보느라 매화나무 근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여러 그루의 매화중, 영각 앞에 있는 홍매화가 아름답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하면서 심은 나무라고 한다. 자장율사가 심었다고 ‘자장매’라고 부른다. 작가들이 연통 같은 렌즈를 돌려가며 사진을 찍었다. 셔터 소리에 놀라 꽃잎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고목에 핀 꽃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왜 사천왕문 밖의 느티나무처럼 애처롭고 슬픈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얼어붙은 땅에서 사백여 년 가까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숱한 어려움을 이겨낸 매화라 그런가? 

 작고 앙증맞은 꽃이 황홀하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신비롭다. 매화의 자태는 보는 위치와 배경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 단청 밑에서 보는 매화는 오색단청을 배경으로 화려하다. 나무 창살을 배경으로 한 매화는 단아하고 기품이 있다. 푸른 하늘 밑의 매화는 구름과 한 폭의 그림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금강계단에 있는 사리보다 매화가 더 경이롭다. 눈에 담으면 잃어버릴까 봐 카메라에 담고 화폭에 담는다. 나는 내 마음에 곱게 담았다.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이라 했다.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더라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흠의 수필집 <야언>에 등장하는 이 글귀는 매화의 고고한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지조와 절개를 지켜 품위를 잃지 않는 선비에 빗댄 표현이다. 따뜻한 봄바람에 꽃봉오리를 터트리는 다른 꽃들과는 달리 매화는 혹독한 바람을 이기고 차가운 눈 속에서 꽃을 피운다. 하물며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자장매의 아름다움이야 오죽할까. 새색시의 수줍은 볼처럼 꽃망울을 터트린 매화가 반가운 것은 곧 따듯한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지 않을 것 같지만 봄은 어김없이 온다. 봄이 오면 기분 좋은 소식들이 넘쳐서 매화처럼 영롱하고, 밝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온갖 만물이 각각의 모습으로 태어나 각자의 삶을 산다. 살아가는 동안 사람이든 나무든 상처를 입는다. 치유해 일어나기도 하지만 수명을 다하면 회복하지 못한다. 느티나무를 보면서 우리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의 생명체가 몇 살을 살든 생명의 끈을 놓을 때까지는 자장매처럼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조정숙 시인 오영수문학관 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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