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생가’ 연필화가 원석연 작가의 1969년 작품.  아트사이드갤러리 제공
‘박정희 생가’ 연필화가 원석연 작가의 1969년 작품.  아트사이드갤러리 제공

 

김동수 관세사·경영학 박사
김동수 관세사·경영학 박사

 1966년, 강원도 산지(山地)에 목축 단지를 조성할 즈음 김영삼, 김대중 등 야당 정치인들이 산림훼손이라며 맹렬히 반대하자, 박정희 대통령(이하 박정희) TV 신년 기자회견에서의 말이다. "저는 키가 작습니다. 우유를 못 먹고 자라서 그런가 싶습니다…. 그러나 제 아들 지만(당시 중학생)이는 우유를 마시고 커서 그런지 키가 벌써 저보다 큽니다. 저는 보리밥으로 길들여진 위(胃)라서 그런지 우유가 소화가 안 됩니다(웃음). 우유를 먹는 식생활 때문인지 일본 중·고등학생들의 키가 우리 학생들보다 평균 1㎝ 정도 크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우유를 먹여야 합니다…" 가슴이 찡했다.

 1970년 가을! 박정희는 전라북도 김제평야 논에 직접 들어가 그동안 개발한 통일벼 낱알을 하나씩 세었다. 한 이삭에 평균 80~90알뿐이던 것이 140여알 이상이 열렸다. 그날 박정희는 논두렁에서 농부들과 막걸리잔을 연거푸 비웠다. 박정희는 통일벼 개발로 50% 이상 쌀이 증산되자 한민족에게 천형(天刑)이나 다름없었던 그 지독한 배고픔의 보릿고개가 사라지자 그때까지 엄금했던 쌀 막걸리 양조를 풀었다. 

 박정희는 ‘우리도 할 수 있다’를 부르짖었다. 소박했지만 사자후(獅子吼)였다. 한민족이 거국적으로 가난(貧)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산(山)을 옮기는 것처럼 엄청난 일이다. 한두 사람의 선각자는 벗어날 수 있겠으나, 민족 전체가 벗어난다는 것은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경칩을 계기로 일제히 깨어 일어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창조적인 일인 까닭이다.

 그런데 역사 속에는 그런 창조적인 지조(志操)를 보여준 지도자가 있다. 독일 통일의 주역이었던 비스마르크가 게르만 민족을 깨우고자 "우리는 신(神) 이외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의 지조를 포효(咆哮)했다. 비스마르크의 그 포효가 게르만 전 민족에게 지조를 품게 하면서 통일독일국가를 만들어 프랑스를 패전시키는 매직파워(Magic Power)를 발휘했다.

 오늘날 우리가 지난날의 박정희를 높이 사는 것은 바로 이 「매직워드」로 우리 한(韓)민족 전체에게 창조적인 지조를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우리 국민은 거의 모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박정희 매직워드에 따라 거듭 일하고 거듭 연구했다.

 박정희는 우리 국민 모두에게 천형처럼 주어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독기에 가까운 지조를 불어넣으면서 가난을 내려놓을 수 없는 등짐처럼 지고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 농민 등 서민들에게 애정을 쏟았다. 박정희가 구술(口述)을 통해 자신의 삶과 생각을 밝힌 『국가와 혁명과 나』에 이런 대목이 있다. "본인은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그 서민의 인정(人情) 속에서 내 인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박정희는 혁명적인 정치로 가난을 떨쳐내기 위한 자신의 구상과 약속을 대부분 구현했다. 그 결과 한국인들은 천지개벽에 가까운 가난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나도 할 수 있다」는 지조적인 소위 ‘Can Do Spirit’ 인간형으로 탈바꿈했다. 이것이 온갖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담겨있는 이유이다. 그는 매달 한 번씩 열리는 수출무역진흥확대회의에 한 번도 빠짐 없이 꼬박꼬박 참석하고 수출경제개발 이른바 수출입국(輸出立國)에 전력투구했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발전 리더십의 발현이 아니라 이른바 소명(召命)의식을 가진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창조적인 의식이다. 이것이 그가 대통령이 돼 추진한 많은 정책 프로젝트에서 반대와 비아냥거림에 부딪힐 때마다 굴하지 않은 이유다. 박정희 집권 이후 우리 한국은 마침내 강소국이 됐고, 중국과 일본은 더 이상 우리나라 위에 군림하지 못했다. 

 이런 박정희 등에다 당시 야당의 소위 양김(兩金: 김영삼 김대중)과 그들 추종자들은 줄기차게 독재 딱지를 붙였다. 그리고 박정희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무조건 「독재 프레임」을 씌우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박정희 등에 붙인 독재는 일반 국민과는 무관한 독재였다. 독재란 혹독한 법률, 과중한 세금 등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뭉개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가 억압돼야 독재다. 

 그런데 당시 일반 국민들 중 박정희가 독재를 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데올로기 정치인 이외는 거의 없었다. 그러함에도 양김(兩金)은 논두렁의 황소개구리처럼 "독재자 박정희~~" 하고 끝없이 왈왈거렸다. 그 결과 1980년 이후 세대들은 박정희는 독재자로 알려졌고 양김은 차례로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먼저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IMF를 초래했고 그의 후계자 김대중은 북한에 소위 햇볕정책을 행해 오늘날 핵무기 국가가 되도록 했다. 그러함에도 오늘도 양김의 후계자들은 ‘박정희=독재=파시스트’라는 도식의 반(反) 박정희 논리를 40년 넘게 유지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박정희 이후 지조적인 소명의식의 대통령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저 ‘표’만 쫓아다니는 자들만 등장했다. 그것은 정치인의 미덕이 아니라 악덕일터! 이에 지적하노니! 이제는 그가 누구든지 박정희와 같이 소명의식의 정치인이어야 쉽게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을 넘어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대통령이 될 것으로 본다. 

 박정희는 국내외적으로 다사다난했던 1960년대와 70년대의 대통령이었던 만큼 그에게도 공(功)만이 아니라 과(過)가 없지 않을 것이다. 사실 박정희가 한때 민주주의를 부분 부분 제약한 일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과오를 뛰어넘는 공이 너무도 크다. 정치지도자로서 한국인의 혼을 일깨운 것보다 더 큰 공이 어디 있으랴! 

올해는 박정희 5·16 혁명 50주년이 되는 해다. 오늘 젊은 세대들은 박정희와 거의 동시대를 살아온 오늘의 70·80·90세대들이 왜 거의 모두가 박정희를 그리워하고 향수(鄕愁)에 젖는 대화를 많이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으면 한다. 김동수 관세사·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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