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문사 20명 보인계 결성
  봄·가을에 모여 한시로 우의 다져
“45년간 이어온 작품 시민과 공유”

 

일제강점기인 1932년(임신년) 울산지역 문사(文士) 20명이 모임을 결성해 이후 매년 봄·가을이면 모여 한시를 짓고 현실을 토로하며 우의를 다졌던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의 이름은 ‘보인계’로 1970년대에 이르러 사망과 이주 등으로 계원 숫자가 줄어들어, 1976년 여름 청계 류흥호 집에서 가진 계회를 끝으로 45년 동안의 활동을 접었다.
 

울산대곡박물관이 발간한 <역주 보인계시첩(譯註 輔仁契詩帖)>.
‘보인계'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 울산지역 문사 20명이 모임을 결성해 이후 매년 봄과 가을이면 모여 한시를 짓고 현실을 토로하며 우의를 다졌던 모임이다. 여러 집안에 남아있던 선대(보인계 회원)가 남긴 한시를 모아 후손들이 묶어낸 <보인계시첩>.

1980년에는 보인계 계원의 후손 18명이 선대의 뜻을 이어받기로 해 ‘보인계 승계회’를 결성했다. 승계회의 회장은 아정 박맹진의 아들 박태수였고, 총무는 학산 이성락의 아들 이수은이었다. 이들도 보인계처럼 각 가정을 돌아가면서 계회를 가졌으며, 당시까지 여러 집안에 남아있던 선대가 남긴 한시를 모아 <보인계시첩>으로 묶어냈다. 

<보인계시첩>에 수록된 한시는 282수이며, 지은이는 보인계 계원 17명과 계원이 아닌 사람 41명을 포함해 모두 58명이다. 계회에서는 계원이 아닌 사람도 자주 초대해 함께 교유하고 한시를 지었던 것이다. 

계원 가운데 3명은 작품이 빠져있으며, 한시는 계원 17명이 지은 시가 209수, 비계원 41명이 지은 시가 73수이다.

보인계원이 수십 번의 모임에서 지은 한시와 관련 자료는 현재 다 전해지지 않으며, 절반 정도는 수집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시에는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는데, 보인계 모임 초기에는 당대를 말세로 인식하고 있으며 외세에 의지한 역사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1960년대 이후에는 타계하는 계원들이 생기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하는 작품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1970년대에는 계원의 절반 정도가 남게 되자 시인들은 시대에 대한 관심보다는 늘그막의 자신들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울산대곡박물관 신형석관장은 ‘보인계’에 관한 이야기를 박종해 전 울산예총회장으로부터 접하고, <보인계시첩>에 수록된 한시의 역주본을 발간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울산지역 문사들의 한시 작품과 교유 관계 등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번역은 울산문헌연구소 엄형섭 소장이 맡았으며, 382쪽 분량의 책에는 한시 번역 외에도 보인계와 보인계시첩에 대해 설명한 도움글 2편, 참고사진을 함께 수록했다.

신형석 울산대곡박물관장은 “우연히 <보인계시첩>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45년간 지속돼 온 보인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는데, 이 분들이 남긴 한시를 통해 일제 치하와 격동기를 살아온 울산 지식인들의 문학 활동과 의식세계, 근·현대 지역 유림의 면모에 대해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게 돼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역주본을 발간했다”라고 말했다. 

<역주 보인계시첩(譯註 輔仁契詩帖)>은 관내의 도서관·박물관·문화원 등과 전국의 주요 기관에 배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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